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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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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갑자년
작성자 김강산
내용 갑자년(甲子年) 물난리와 태백

갑자년(甲子年),
정확히는 서기1744년으로 조선 영조(英祖) 20년이다.

그때 태백지역에 물난리가 나서,
그 유명한 황지 절골의 본적사가 떠내려가고,
장성의 장성동과 협심동 사이로 물이 치고나가
독메가 생기는 등 태백의 지형을 많이 변하게 한 사건이다.

그때 곧 갑자년 대홍수(大洪水) 때 태백지역에,
큰 물난리가 나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며,
물가에 있는 조금만 펀펀한 땅이면 물이 치고나가 지금과 같이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생각으론 상상할 수 없는,
천지개벽(天地開闢)에 버금가는 큰 물난리가 났으며,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

지금은 태백지역의 모든 하천이 거의 직선화 비슷하게 되었지만,
조선 영조(英祖) 때인 서기1744년,
갑자년(甲子年) 대홍수(大洪水) 앞에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유추하자면, 그때는 태백지역의 하천이 지금처럼 흐르지 않고,
뱀처럼 구불구불 이루어진 하천이었다.

황지 절골의 삼향장과 본적사 부근이라든가,
통리 백산 철암 동점 등과 창죽 원동 상사미 하사미 조탄 등과,
혈리 소도 화전 문곡 장성 등의 조금만 펀펀한 곳이면 물이 치고나가며 된 것이니, 지금의 물길은 갑자년 대홍수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때 물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 수백 명 이상은 죽었지 않았을까 하며,
우리는 지금 바뀐 지형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살면서,
그 참상을 모를 수도 있으니 안타깝다.

이와 조금이라도 연관 된 글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니, 김종언(金宗彦)이 쓴 척주지(陟州誌)에 보면,
“...(전략)...갑자년에 향교 대성전을 중창하다. 7월에 큰물이 져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이다...(후략)...”(...甲子.鄕校聖殿重刱七月大水漂死累百人...)
라는 글이 있고, 김구혁(金九爀)의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 보면,
“...(전략)... 도호부사 최상정(崔尙鼎)은 계해(癸亥)년 12월에 왔다. 갑자(甲子:서기1744년)년 7월에 큰물이 나서, 옛날부터 없던 바라(千古所無천고소무) 경내의 백성들이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이나 된다. 을축(乙丑)년 12월에 갔다...(후략)...”(...府使崔尙鼎[通訓]癸亥十二月來甲子大水七月千古所無境民漂沒屢百人乙丑十二月去...)
라고 하였으니, 갑자년(甲子年:서기1744년)에 큰 홍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고, 그때 태백지역 전체에 큰 물난리가 났었다고 본다.

그때의 하천은 지금처럼 깊지를 않고 큰물이 나면 자주 물길이 바뀌었다.
아마도 큰 물난리가 난 것은 그때 태백지구에 화전(火田)이 심하여 산에 나무를 베어 헐벗고 마구 파헤쳐 곳곳에 사태(沙汰)가 난 때문이 아닌가 한다.

흡사 지난날 태풍 루사나 매미 때보다 몇 배나 큰 물난리였다.
태풍 루사나 매미 때 피해가 컷던 것은,
산에 방치한 나무들이 떠내려 오며 물길을 막은 것도,
水害(수해)를 키운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갑자년 대홍수(大洪水) 때 수해(水害)가 컷던 것은 화전(火田)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으니,
영조15년에, 신기에 있던 서창(西倉)을 상사미로 옮겨온 것은,
그때 많은 화전민(火田民)들에게 세곡(稅穀)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화전민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대박면(大朴面)이 새로 생기기도 하였으니, 그러므로 갑자년 수해는 화전의 폐해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좀 높은 곳이나 산등은 피해가 덜하였으나,
물가인 경우는 거의 수해(水害)를 피해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본다.

장성의 경우,
독메 부근이 홍수 때문에 지금처럼 된 것이다.
독메가 어디냐 하면,
태백경찰서 뒷 봉우리이다.

본디,
독메는 우금산에서 뻗어온 야트막한 산줄기 끝에 솟은 거였는데,
갑자년(甲子年) 대홍수로 물이 치고나가 지금처럼 된 것이다.
마치 황지 절골의 본적사 뒷산을 물이 치고나가 듯이 한 것이다.

갑자년(甲子年) 대홍수(大洪水) 앞에는 황지천이 장성초등학교가 있는 용쏘 터로 해서 옛 화광동 부근을 거쳐 장성중앙시장 쪽으로 흘러갔었다. 그 흔적으로, 용쏘 터는 말할 것도 없으며 지금도 장성중앙시장 옆길 지하에는 도랑이 남아있다.
도랑은 양쪽으로 석축(石築)을 한 것이고, 몇 십 년이 되어 위태롭다.

요즘 이런 사실을 모르면서,
독메가 생긴 것은 지질시대(地質時代) 운운 하고 있는데,,,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라 불과 279년 앞이다.

메밀뜨리도 갑자년 대홍수(大洪水) 뒤에 지금처럼 된 곳이다.
태백시가 되고도 메밀뜨리엔, 논이 있었는데,
동점의 사근드리와 메밀뜨리의 논에서 수확한 쌀로 밥을 지으면,
태백시민이 한 끼 정도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이밖에도,
갑자년(甲子年)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뀐 곳이,
참 많다.

통리의 소란 부근
백산의 황철배기 부근
철암의 머릿골과 농공단지가 있는 늪밭
동점의 동점초등학교 부근
혈리의 피골 어귀
소도의 버들치 부근
화전의 쑤아밭
황지의 늪골 부근
문곡의 섬거랑과 진골 어귀
장성의 하장성 부근과 두물나드리 갈마늪
창죽의 안창죽과 열님이네 미께
원동의 죽현원 터와 평지말 부근
상사미 늪물과 디디기벌 부근
하사미 천포와 신거터 부근
조탄 공세뜰 부근, 더 있지만 하 많아 대충 큰 것만, 그만할래...
이 모든 곳이 갑자년 물난리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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