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소통참여
소통참여 시민게시판

시민게시판

작성일 2024.03.18
소통참여>시민게시판 상세보기 - 제목, 작성자, 내용, 파일, 제공
제목 돌장승 이야기
작성자 김강산
내용 장승 이야기

소도 당골 광장과 단군성전 사이의 길 가 양쪽에 돌장승이 서있다.
강원도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돌장승 때문에 장생리(長生里) 장생면(長生面) 상장생면(上長生面)
상장면(上長面) 장성읍(長省邑)이 생겼으니,
태백시의 전신(前身)이다.

본디 돌장승은 늪물(용늪:용담) 위쪽 약300m지점 솔밭 속 미루둔지에 있었는데,
서기1966년 망경사에 살던,
김보살(佛名불명 金眞淨行김진정행)이 망경사 경내로 옮겨 간 것이다.
김보살은 그때 사람을 사서 8목도로 며칠에 걸쳐 옮겨갔다고 한다.

태백산 꼭대기에는 신사(神祠) 곧 천왕당이라 부르는 당집이 있어,
고대(古代)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 천왕당으로 가는 태백산 어귀에 장승을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게 하였다.

이 장승은 실직국의 땅을 빼앗은,
신라국의 왕 일성이사금(逸泥師今)이 실직국이 망하고,
34년 뒤, 태백산에 천제를 올릴 때 세웠다고 한다.
장승이 서 있는 언덕이라고 장승둔지라 하였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미루둔지라 하였다.
미루는 미륵이라는 말인데, 장승을 미륵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것을 왜정(倭政) 때 왜인(倭人)들이,
천제를 금지시키니,
천제단과 장승은 숲속에 버려지게 된 것이다.

그 뒤 서기1955년경 소도 출신 무당,
망경사의 창건주나 다름없는 김보살이라는 사람이,
신병(神病)이 와서 거의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온 사방을 헤매고 다니다가,
당골 장승둔지(미루둔지)에 있던 돌장승에게 와서,
미륵님이라고 하며 엎드려 빌었다.
그러다가 신병이 어지간히 낫자,
김보살은 태백산 용웅굴 옆의 태백산사 옛 터로 올라가게 되었다,

한편, 태백산 용웅굴(龍井용정) 옆의 태백산사(太白山祠) 터에는,
이 지방에서 유명했던 박묵암(朴黙庵)이라는 승려가,
6.25전쟁 뒤, 불타서 버려진 그 터에 토굴을 짓고 그 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신병(神病)이 어지간히 안정된 김보살이 태백산사 터로 올라가 기거하면서,
먼저 온 박묵암 스님과 자연스럽게 동거(同居)하게 되었고,
박묵암 스님은 고매하여 오랫동안 수도한 사람인데,
김보살을 만나 파계승이 되고 말았다.

김보살이 처음 신(神)이 왔을 때는 신통하기로 소문이 나서 잘 알아맞히고,
기도하면 척척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보살을 보고 태백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결국 박묵암 스님은 태백산사 터에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수도하던 사람이었지만, 이때쯤에는 존재감이 덜 하고 김보살이 더 부각되었다.
사후(死後)에도 김보살의 비(碑)는 있으나,
박묵암 스님의 흔적은 없다.(있다, 단종비의 한쪽 면에 그 이름이 있다.)

김보살이 절집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물을 신축하며 폐허이던 태백산사 터를,
지금의 망경사로 만드는 토대를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때 단종신(端宗神)을 몸주로 모시던 주변 보살들이,
다투어 단종신과 연관된 절을 짓는 등 주변을 정리하는 데,
영향을 받은 김보살은 같은 단종신(端宗神)을 모시는 터라,
아예, 단종비각을 짓고자 마음먹었다.
이어 박묵암 스님에게 말하여 탄허 스님에게 글을 지어 와 단종대왕비도 만들었다.

비록 파계승이 되었지만,
그 앞에 묵암스님은 탄허 스님과 함께,
방한암 스님을 스승으로 둔 사형사제 사이였다.
그래서 현판 글씨며 비문(碑文)을 지어 올 수 있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의 불법 사이비 사찰 철거 때 대왕암이나 천지암이 헐리면서 도 망경사가 살아남은 것은, 박묵암 스님이 오대산 월정사 소속 승려였기에 무사했던 것이다.

지난날,
김보살이 신병(神病)이 걸렸을 때,
미륵님 앞에서 빌던 생각을 하고 그 미륵 곧 장승을 모셔가기로 하였다.
옮겨 간 돌장승은,
김보살 생전에는 돌장승을 미륵님이라고 하며 떠받들고,
돌장승 앞에 음식물도 올려 지곤 했다.
김보살이 잘 나갈 때 단종비각(端宗碑閣)도 세우고,
돌장승도 옮겨가고 했는데, 김보살이 죽자 돌장승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절에서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절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도 아니고, 나한(羅漢)도 아닌,
장승을 모실 명분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김보살의 양자인 망경사 주지 최종명 스님을 만나,
이 장승은 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미륵도 나한도 아니고 당골에서 태백산을 지키던,
돌장승일 뿐이라고 설득을 하여 다시 당골로 내려 올 수 있었다.

서기1987년 2월17일 창죽 사람들 11명을,
나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인 뒤,
그때, 상동행 버스를 타고 백단사 입구에서 내려 태백산으로 올라갔다.

창죽 사람들과 함께 현장에서 참나무로 발구를 만들고,
장승에 부직포를 씌워 싣고 약50cm 이상 쌓인 눈밭을 헤치고 끌며,
하루만에 내려왔다.

그때, 김영복이라는 사람이, 혈리 당골로 자기 타이탄 트럭을 몰고 와,
장승을 싣고 장승둔지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당골 광장이 조성되어 장승둔지 부근 솔숲에는 사람들이 들르지 않고,
곧바로 광장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한번 옮겨갔던 장승이니,
복원에 즈음하여 사람도 찾지 않는 본디의 자리보다는,
사람들이 들끓는 광장 쪽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때 장소는 심영수씨 땅이었고,
시내 공업사에서 크레인을 돈 주고 이용,
큰 돌을 옮겨 좌대(座臺)를 만들어 천장(天將) 지장(地將)이라 쓰고 올려놓았으며,
주변에 석축(石築)을 하였다.

그때 아니 했으면,
장승은 절 옆에 방치되고 절 재산이 되어,
문화재가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돌장승은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태백에서 자연물 빼고 사람이 만든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지금은 강원도 지정 민속자료로 되어 있지만,
국가 지정으로 높여야 한다고 본다.
파일

담당자 정보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 공간정보과
  • 담당자 : 전산팀
  • 문의전화 : 033-55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