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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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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제이야기
작성자 김강산
내용 천제 이야기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천제단(天祭壇)에서 천제(天祭)를 지내고 있다.
본디는, 6.25 전쟁이 끝나고 서기1966년 경상도 봉화군 물야면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지내던 것을,
내가 서기1990년에 가져와, 지금까지 태백문화원에서 지내고 있다.

지금, 천제단(天祭壇)이라고 하는 것은,
태백산 꼭대기에 있던 神祠(신사) 곧,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 태백신사(太白神祠) 태백사(太白祠) 천신사(天神祠) 천왕사(天王祠) 태백당(太白堂) 천신당(天神堂) 천왕당(天王堂) 등으로 표기하고 불리던,
신사(神祠) 곧 당집을 둘러 싼 담장의 돌인데,
조선 인조 3년에 김치(金緻)라는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신사를 불태워 헐어버리자, 타지 않고 남아있던 담장의 돌을 모아,
사람들이 천신단(天神壇) 또는 천왕단(天王壇)이라며 기도 제사하던,
신사(神祠) 곧 신단(神壇)을 만든 그 돌이다.

이렇게 서기1965년까지 그냥 돌무더기처럼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서기1966년에 뜻있는 몇 사람들이,
신사(神祠)라고 하는 그 돌무더기를 다시 쌓은 것이다.
그 중심(中心)에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에 살던 우성조(禹聖祚,丁巳生)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돌무더기에 관심을 두었다.
우리 전통문화나 제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를 따르던 봉화사람들과,
태백산에 올라 태백산 신사 터의 돌로 제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 제사하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천제에 눈을 떴고 나중에 뜻있는,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황지리 사람 일부를 참여시켰다.
처음에 그는 물야국민학교 교장 출신이라 하였으나, 확인이 아니 된다.
어쨌거나 우성조(禹聖祚)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천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서기1973년 황지리는 황지읍으로 승격이 되어,
그동안 이장(里長)이던 사람이 읍장(邑長)이 되고,
이어 읍장이 제사지내러 올라가고 봉화에서는 군수가 제사지내려 왔다.
이때 의전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 때 불법 사이비 종교 정비에 걸려,
태백산 천제행사가 사라지게 생겼다.
우성조(禹聖祚)씨는 태백산 천제행사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사상과 비슷한 대종교(大倧敎)로 가입하게 된다.

우성조(禹聖祚)씨가 대종교에 가입하였다고 하나,
요즘 일부 불교종단에서 종단에 가입하고서도, 사찰은 개인소유를 인정하듯,
우성조(禹聖祚)씨도 ‘대종교 태백지사 전사’(大倧敎太白支社殿司)라는,
독자(獨自) 직함이 있었다.
물론 대종교에 문의한 결과, 그런 직함은 없다고 하였다.
명색이 대종교에 가입한 우성조(禹聖祚)씨는 ‘한배검’이라는 비를 세우고,
제단(祭壇)을 제법 그럴싸하게 원형으로 쌓았다.
그리고 제단 이름을 제천단(祭天壇)이라 하였다.
그때가 서기1976년이었다.

의전(儀典)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곧 군수와 읍장의 의전 차이였다.
우성조(禹聖祚)씨가 대종교로 가자, 황지읍의 유지라 자처하는 자들이,
우리는 대종교 안 한다고 천제단을 포기하고 떨어져 나와,
소도 당골 심모씨 땅에 단군성전(檀君聖殿)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그 때가 서기1979년이었다.
그래도 사이비 종교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지,
그들도 비슷한 신흥종교라 할 단단학회(檀檀學會)라는 곳에 가입하게 된다.

그 앞에 삼척군 장성읍(長省邑) 황지리(黃池里)에 살던, 나는,
태백산 꼭대기에서 지내는 천제(天祭)에 참석하고 해마다 올라갔다.
이러구러,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쳐져 서기1981년 7월 1일부로 태백시가 탄생한다.
나는 계속 태백산 정상으로 올라가 제사에 참여한다.
그것은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제단(祭壇)이 전통 있고 역사가 깊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태백시가 되고도 계속 올라가 제사하니까,
태백제 위원회나 지방의 유지라 자처하는 자들이, 나를,
대종교인이라고 비난을 해도 계속 올라갔다.
그러는 와중에 우성조(禹聖祚)씨는 어느덧 교주(敎主)가 되어 있었다.

서기1989년 제천단(祭天壇)에서 하늘에 제사하기 위해 준비하는데,
어느 미친 신도(信徒) 하나가 날뛰며,
말로는 아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우성조(禹聖祚)씨의 아들과 딸 사위들이 달려들어 제지하다 아니 되니,
폭력을 행사하였고, 제천단 앞 광장에 피가 뿌려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제사보다는 젯밥에 눈이 먼 자들, 이 신성한 곳에서,
피를 뿌리다니, 같이 못 지내겠어’ 하고 혼자 말을 하는데,
뒤에서 누가 말하길 ‘국장님이 지내세요’ 한다.
그러자, 내가, ‘못 지낼 것도 없지, 돈이 문제지’
이렇게 흘려 말하자, 예의 그 사람이 ‘얼마나 들어가요?’ ‘한 500만원이면 지내지 않나?’ ‘그 돈 내가 낼게요’
나는 깜짝 놀라 그제야 뒤 돌아 보니,
황지에 사는 무당 고춘자(高春子)씨 였다.
‘고보살 아니요? 말은 고마우나 안 들은 걸로 하겠소’
그리고 기분이 상한 채로 산을 내려 왔다.

얼마 뒤 고춘자씨로부터 나에게,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문화다방(文化茶房)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보니, 고춘자씨를 비롯 여인들이 19명이 모여 있었다.
말인 즉 슨,
무당인 고춘자씨가 신성한 제천단(祭天壇)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돈을 내겠다고 말하게 되었고,
그때에 500만원이 뉘 아 이름이냐?
신성한 곳에서 뱉은 말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매일 신당(神堂)에 엎드려 비는데,
하루는 신당 쪽에서 말소리가 들리며, ‘왜, 니 혼자 하려 하냐? 같이 해라’하여,
정신이 번쩍 들며, 신도(信徒)인, 말만하면 다 아는 여인들을,
끌어 모아 본인 포함 19명이니, 나보고,
‘국장님이 들어오면 20명이 되고 매월 2만원씩 붙는 계(契)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10달 부우면 400만원이고 나머지 100만원은 고춘자씨 자신이 내겠다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나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천제계(天祭契)가 만들어지고,
매월 2만원씩 10개월을 붙자 400만원이 되었고,
고춘자씨가 100만원을 내놓아 합이 500만원이 생겼다.
그러나, 그 돈으로 알아보니, 제사준비에 들어가는 물건 사는데,
필요한 돈에, 턱도 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나는, 시내를 돌며 모금운동을 하여 1000여만 원 정도를 모았다.
그래서, 내가, 그 돈과 500만원을 합쳐 서울이나 경기도 안성 등을 오가며,
제기와 제복을 맞추었다.
그리고 서울 인사동에서 구한 옛 별지도를 보고 28수기를 그렸고,
옛 그림을 보고 제기(祭器)를 만들었으며, 홀기(笏記)도 한글로 했다.

서기1990년 10월 3일 개천절에, 나는, 태백문화원 청년회 회원들을 대리고,
태백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회원 가운데 덩치는 좋으나 평생 그런 일은 아니 해봤는지,
산에 올라가다가 퍼진 자도 있었다.
처음, 올라갈 때는 우성조(禹聖祚)씨가 거느리는 사람들이 제사하면,
그 뒤에 제사를 올릴 요량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 우성조씨 패 곧 경북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 날이 추석과 겹쳐지는 통에,
유교사상이 강한 경상도 사람들이, 조상제사가 먼저지,
천제는 나중이라는 생각에, 오지 않은 것이라 했고,
한참 뒤인 한글날 곧 10월 9일에 제사지내고 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우성조씨 패가 오지 않자, 느긋하게 제사를 지내게 된, 나는,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제사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하길, 지금이 어느 땐데,
왕복을 입고하느냐 고, 해,
이듬해부터 전체가 갓과 흰 도포로 바꾸고 제관들의 표시로,
도포끈을 붉은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갓과 도포를 넣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축문도 한글로 바꾸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그 행사가 있기 앞에,
나는 제천대회(祭天大會)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서기1991년 개천절에 우성조씨와 내가 충돌하게 되는데,
서로 누가 먼저 제사를 올리느냐로 옥신각신하였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통리사람들이, ‘제사를 먼저 지내야지, 다음 곧 뒤에 지내면 의미가 없다’고 해,
내가 먼저 지내기로 작정하고,
경북 사람들이 오기 앞에, 먼저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때가 되길 기다리니,
경북의 우성조(禹聖祚)씨가 다가와,
‘강사이(강산) 이놈, 내 밑에서 제사하던 놈이, 감히, 비키지 못 하겠어’
하는데, 내 아버지 보다 나이 많은 분으로, 젊어서 차력공부를 하셨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는데, 손이 내손 두배는 되고, 그 큰 손으로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 얼굴을 쥐어박으며,
‘이놈시키 혼 좀 내 줄까?’
쥐어 박히면서도,
‘어르신 작년에 왜 안 오셨어요?’
‘이놈시키 추석이니 안 왔지’
‘천제 지내는데, 추석이라고 아니 오고 눈 온다고 아니 오고 비 온다고 아니 오면 됩니까? 천신께서 선몽 하시 길, 우성조 믿다간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으니, 앞으로 강산이 니가 지내라 합디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 큰 손을 거두며,
‘빨리 지내, 이놈시키’
그 순간,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천제(天祭)가 넘어 오고 있었다.

나의 주청으로, 태백시에서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되었고,
그때 문화재 위원이던,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 하던 임동권(任東權;丙寅生병인생)씨가, 태백산으로 실사(實査)를 나와, 천제 지내는 광경을 봤으며,
내가, 모든 자료를 제공하였다.

처음, 사적(史蹟)으로 한다고 하여 출입금지구역으로 되는 것을 꺼려하여,
한 단계 낮추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민속자료(民俗資料)로 해달라고,
내가, 문화재 위원이던 임동권 교수에게 부탁하였고,
제단명칭을 천제단으로 해 달라고 하였으며, 그때부터 지금의 명칭이 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천제단(天祭壇)에서 제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드디어, 서기1991년 10월 23일자로, 태백산 천제단이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이 되었다.

참고로, 위 우성조(禹聖祚)씨와 태백문화원 제3대부터 원장을 하신 우성조(禹星祚)씨와는 동명이인이고, 다르므로, 독자 여러분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아니 태백산이 나를 도구삼아 이루어진 일이라고 본다.

그 뒤, 새로이 지은 단군성전(檀君聖殿)에는 지역 유지라 자처하는 자들이 많아서인지, 태백제 위원회에서 400만원을 지원하고, 나에게는 200만원을 준단다.
나는 거절하였고, 줄려면 단군성전과 같이 주던 가, 왜? 차별하느냐고 하였다.
그 뒤 10여 년 간 태백시와 그 어떤 위원회나 단체에서도 지원이 없었으며,
나는 집념과 옳다고 여기는 신념으로,
T셔츠를 만들어 팔고 또 거금도 하며 돈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고,
사이사이 태백산 천제의 홍보를 잊지 않았다.
오죽하면 전라도 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산다는 공 모씨가,
자기도 무등산에서 제례를 하고 싶다며 천제에 대한 자료를 부탁해,
한글로 된 홀기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서기1992년 나는 땅끝마을이 있는 전남 해남문화원 소속,
‘진법군고소’ 회원100여명을 초청 태백시내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이튿날 태백산에 올라 천제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태백산 천제를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하다못해,
30만 회원을 자랑하던 ‘대한승공경신연합회’와 협약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뒤 어느 해 개천절을 앞두고, 전화가 왔는데, 태백시장이던 홍순일(洪淳佾)씨가 천제단에 천제를 지내러 오겠다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래도 태백시장인데,
태백산에 올라오겠다는 것을 거절하지는 못하고, 그러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었다.
얼마 뒤, 이번에는 국회의원 유승규씨가 태백산에 올라오겠단다. 난감하였다.
태백시장에게 먼저 허락하였는데, 나중에 또 승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름 꾀를 내어 말하길, ‘의원님, 단군성전으로 가세요, 이곳 천제단에는 외지 사람들이 많아 표에 도움이 아니 되고요, 단군성전에는 지방 사람이 많아 좋아요.’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러나 천제단에 올라온, 홍순일씨는 붙었으나 단군성전으로 간 유승규씨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일까? 선거철만 되면, 신분을 감춘 자들이, 태백산 꼭대기의 천제단으로 모여와 기도하고 난리다.

또 할 말은 초의(草衣)를 입고하는, 제례는,
홍순일씨가 태백산에 올라오면서 내 역할이 줄어들자 만든 것으로,
그 앞에는 없었고, 그 일 뒤부터 한 것이다.

그리고 천제에 쓰는 천주(天酒)는 천제에 관심이 많은,
김순달(金順達:庚午生경오생)회장이 도맡아 그동안 자기 집에서 담궜는데,
서기2002년 조미영(趙美英:辛卯生신묘생)씨의 제안으로,
정선군 임계장의 모 골동품 가게에서 독(甕옹)을 사서,
태백산으로 옮겨 묻어 지금처럼 현장에서 천주(天酒)를 담그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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